재발견논단

 
작성일 : 09-09-22 11:49
순도고문의 강의<曉峰스님의 一代記 02>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245  

世尊 應化 2936年 丙子 10月 11日

蓬萊 釋漢岩 書于 五臺山 上院 室中

* 여름 안거는 태백산(太白山) 정선(旌善) 정암사(淨岩寺)에서 범어사의 동산(東山) 스님과 수덕사의 혜암(惠菴) 스님과 함께 지내다.

<* 이 때 정암사 도량 중심으로 흐르는 계곡 물을 미리 잘 관리토록 하여 병자년 대홍수인 병자수파(丙子水敗)를 면했다 한다.>

* 겨울 안거는 덕숭산(德崇山) 수덕사(修德寺)의 정혜사(定慧寺)선원에서 만공(滿空) 선사를 모시고 지내다.

** 1937년(丁丑年: 50세)

* 덕숭산 정혜사 선원에서 만공 선사로부터 다음 게송과 함께  "선옹(船翁) " 이라는 법호와 인가를 받다.

* 西來家風

爲 船翁法子

無偏正道理 今付船翁子

駕無底船 隨流得妙也

佛紀 2964年 丁丑 陰 正月 日

湖西 德崇山 金仙洞 小林草堂

滿空月面 漏


* 승보종찰(僧寶宗刹) 조계산(曹溪山) 송광사(松廣寺)를 참배하다.

<* 그 당시 제방선원에서 추앙 받던 선지식이었던 만공 선사와 한암 선사에게 두루 인가를 받고 난 후, 운수행각의 발길은 다시 남쪽으로 향했다. 스님은 마침내 불일 보조국사(佛日 普照國師)의 근본도량인 승보종찰 조계산 송광사에 이르렀다. 처음 온 곳인데도 모든 것이 낯설지가 않았다. 전생에 많이 살던 도량인양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까지 스님을 반기는 것만 같았다. 마치 옛 고향에 찾아 온 것처럼 신심(身心)이 무척 안온했다고 스님은 그 때를 가끔 회고하였다.>


* 동방제일도량(東方第一道場)인 송광사 삼일암(三日庵) 선원에 주석하다.

<* 드디어 승보도량인 조계산 송광사에 이르러 운수행각의 발길은 멈추게 되었다. 이로부터 10여 년 간 스님은 송광사 삼일암 선원에 주석하면서 운수납자들을 제접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불일 보조국사의 목우가풍(牧牛家風)과 정혜쌍수(定慧雙修), 조계선풍(曹溪禪風)을 오늘날에 계승하고 재현하려는 원력을 세웠다. 이는 이 시대에 필요한 현전승보(現前僧寶)를 양성하고 제2의 정혜결사(定慧結社) 운동을 전개하여 침체된 한국불교의 중흥(中興)과 선풍 진작(禪風振作)을 위한 원력이었다. 조계산 송광사를 옛날의 해동제일도량답게 장엄하고, 16 국사를 배출한 승보도량답게 중흥키 위한 염원으로 운수행각의 길을 멈추고 송광사에 주석 (住錫)하였다.>


* 송광사 삼일암 선원 회주(會主)인 조실(祖室) 화상에 추대되다.

<* 스님이 송광사 삼일암에 안거하고 있을 때, 남원골에 산다는 한 처사가 찾아 와서 제자 되기를 간청하였다. 음력 4월 8일. 부처님 오신날인 불탄절(佛誕節)을 맞아 제자를 삼으니, 그가 곧 수련(秀蓮)이란 법명으로 수계 득도한 맏상좌인 구산(九山) 스님이었다.>

* 승보종찰 송광사에서 대종사(大宗師) 법계(法階)를 품수하다.

** 1938년(戊寅年: 51세)

* 보조국사 제16세 법손(法孫)인 고봉국사(高峰國師)로부터 몽중수기(夢中受記)를 받다.


<* 송광사 삼일암에 주석한지도 벌써 한해가 지났다. 스님은 불일 보조국사의 사상을 흠모 하면서 스님의 사상과 수행가풍을 새롭게 정립하고 조계선풍을 진작하기 위한 원력으로 지 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은 너무도 신기한 꿈을 꾸었다. 보조국사 제16세 법손인 고봉국사께서 꿈에 나타나 몽중법문과 게송을 새로운 법호(法號)와 함께 스님에게 전해주지 않은가!

그때까지만 해도 금강산에서 은사스님이 주신 운봉 원명(雲峰元明)이란 법명과 법호를 사용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어인 일인가?

뜻밖에 고봉국사께서 효봉학눌(曉峰學訥)이란 이름과 함께 다음 게송을 일러 주신 것이다. 너무나 생생한 꿈이었고 법문이었기에 스님은 꿈을 깨자마자 바로 그 게송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스님은 보조국사를 비롯 16국사의 법은(法恩)이 지중함을 절감하고 법명과 법호를 이내 효봉 학눌이라 개명하고, 송광사 승보도량의 전통인 목우가풍과 조계선풍을 크게 진작 하리라 다시 한번 다짐하였다.>


* 示 三日庵 曉峰法子

煩惱盡時生死絶 微細流注永斷滅

圓覺大智常獨存 卽現百億化身佛

佛紀 2965年(1938年) 4月 28日 曉

普照國師 第十六世 法孫 高峰 說

夢裡聞說 覺後記得


** 1941년(辛巳年: 54세)

* 금강산 여여원 선원 이사장(理事長)에 취임하다.


<* 금강산 온정리에 있는 여여원 선원의 설립공덕주인 일허 김현 거사의 청으로 재단법인 여여원 재단이사장에 취임하였다. 이때 시자로 일청(一淸) 스님 등이 시봉하였다.>


* 송광사 삼일암 선원에서 은사 석두 스님을 모시고 안거하다.


<* 금강산에서 은사스님과 해어진 후, 스님은 오랜만에 은사스님을 송광사 삼일암 선원에서 모시고 살았다. 그 후, 석두 선사는 송광사 부도전에 4부대중(四部大衆)을 위한 보살선원을 개설하고 안거타가 조국의 해방을 맞이하였다.>

** 1944년(甲申年: 57세)

* 금강산 신계사와 여여원 선원을 참배하다.

<* 스님은 마음의 고향인 금강산을 다시 한번 참배하였다. 그런 이듬해엔 일제치하로부터 조국이 해방되었다. 그러나 한반도는 38선으로 분단되고,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사변으로 인해 꿈에 그리던 금강산을 다시 찾지 못하였다.>


** 1945년(乙酉年: 58세)

* 8월 15일! 드디어 36년 간 일본의 식민지로부터 조국이 해방되다.

<* 스님에 있어서 조국의 해방은 남달랐다. 스님의 출가동기가 말해 주듯, 그토록 고대하고 갈망하던 조국의 광복이 찾아 온 것. 그러나 조국이 해방되었다지만 사회 각계각층엔 일제 치하에서 변질된 것이 너무도 많았다. 일본불교의 영향으로 조선불교 교단 역시 크게 변모 되어 한국불교는 이미 대처승화(帶妻僧化)되고 세속화(世俗化)되여 있었다. 하니 불교교단의 정화불사뿐만 아니라, 사회전반에 있어 정화작업을 해야할 일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우선 한국불교 정화운동을 위한 일이 시급했다. 당시 조선불교 교단에서는 한국불교의 유구한 전 통을 되살리고 여법히 수행정진 할 수 있는 총림 도량을 가야산 해인사에 건립하기로 결정 하였다.>

** 1946년(丙戌年: 59세)

* 동안거를 기해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 가야총림(伽倻叢林)이 설립되고, 초대 방장화상 (方丈和尙)에 취임하다.

委 囑 狀

李 曉 峰

朝鮮佛敎 伽倻叢林 祖室和尙을 委囑함

佛紀 2973年(1946年) 11月 6日

朝鮮佛敎 校正 朴 漢 永 印

<* 음력 10월 15일. 드디어 한국불교의 중흥을 위한 대작불사로 가야산 해인사에 종합수도 원인 가야총림이 개설되었다. 스님은 가야총림의 조실스님인 초대 방장화상으로 추대되었다. 스님은 종단정화와 도제양성이라는 큰 꿈을 안고 10여 년 동안 안주했던 조계산 송광사를 떠나, 가야산 해인사로 이석(移錫)하게 되었다.

이때 시자로 원명(元明), 명성(明星) 스님 등이 시봉하였다.>

* 조계산 송광사를 떠나는 심경으로 다음 게송을 읊다.

我來松廣今十年 國老懷中安食眠

曹溪一別緣何事 欲作人天大福田


<* 한국불교의 내일을 기약하고 선풍진작과 도제양성을 위해 10여 년 동안 머물던 조계산 송광사를 떠나는 법문을 하면서 스님은 법상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런 후, 스님은 6.25동란과 비구 대처간의 종단분규로 인해 그토록 그리던 금강산과 송광사를 다시 한번 찾지 못하고 입적하고 말았다.>

** 1947년(丁亥年: 60세)

* 계정혜 삼학(戒定慧三學)을 근수하기 위해 습의산림(習儀山林)을 실수하고 구족계를 중수 (重受)하다.

<* 부처님의 정법(正法)을 선양하고 조계선풍을 널리 고취하며 여법히 수행정진하기 위해선 오로지 계정혜 삼학을 근수해야 한다는 것을 천명하였다. 해인사 가야총림의 대중이 50일간 습의산림을 실시하고, 음력 3월 29일에 상월화상(霜月和尙)을 계사로 구족계를 중수하였다. 이 때 함께 정진했던 총림 대중스님들이 훗날 한국불교 정화불사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근세 한국불교를 중흥시킨 주역들이 되었다. 그때 구산(九山) 스님은 원주와 도감 소임을 번갈아 맡아보고, 일각(一覺) 스님이 입실(入室)했으며, 시자로 원명, 보성(菩成) 스님 등이 시봉하였다.>


** 1950년(庚寅年: 63세)

*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사변으로 인해 가야총림이 해산되다.

<* 6월 25일! 가야산 해인사에 가야총림이 설립된 지 5년이 되던 해, 조국 광복의 기쁨 속 에 한국불교의 중흥을 꿈꾸며 설립된 가야총림이 해산되다니 실로 기막힐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 일을 어찌하랴! 한반도는 남북으로 갈라지고 동족상잔의 6.25 참극으로 인해 전 국토가 전운(戰雲)에 휩싸이고 말았으니, 수행 정진하던 산사(山寺)인들 어찌 조용할 수가 있겠는가? 하기에 가야총림 대중들도 각기 인연 따라 흩어지고 스님 역시 피난길에 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 겨울 안거를 부산 동래 금정산(金井山) 금정사(金井寺)에서 맞이하다.

<* 피난길에 오른 스님은 제자들과 함께 부산 동래구 온천동에 있는 금정산 금정사 선원에 이르러 가까스로 행장을 풀었다. 대구 팔공산 지역과 낙동강 전투는 극히 심하였지만, 부산 지방은 아직 참혹한 전운이 미치지 않았기에 그나마 겨울 안거를 할 수가 있었다.

이 때 구산 스님은 은사스님을 금정사에 계시도록 주선해 드리고, 진주 응석사(凝石寺) 선원 에서 금오(金烏) 선사를 모시고 겨울철에 용맹정진을 할 작심으로 스승 곁을 떠났다.>


** 1951년(辛卯年: 64세)

*동안거 해제일을 맞아 제자인 구산 스님에게  "전법게(傳法偈) "를 전하다.


<* 음력 정월 보름! 고진감래(苦盡甘來)라 했던가! 혹독한 추위를 견뎌 낸 이른봄 매화는 코를 찌르는 향취를 내고, 밤이 깊으면 먼동이 트인다고 했다.

천신만고 끝에 맞이한 조국의 해방이었지만, 다시 동족상잔의 참화에 휩싸인 현실에서 뼈를 깎는 듯한 정진 끝에 구산 스님은 큰 깨달음을 얻게 된 것. 한없는 선열 속에 다음 게송을 은사스님께 바쳤다.

大地色相本來空 以手指空豈有情

枯木立岩無寒暑 春來花發秋成實

이에 은사스님의 환희에 찬 미소와 점두(點頭)로 구산 스님은 다음의 전법게를 받았다.>

裁得一株梅 古風花已開

汝見應結實 還我種子來

한 그루 매화를 심었더니

옛 바람에 꽃이 피었구나

그대 열매를 보았으리니

내게 그 종자를 가져오너라.


<* 이 전법게는 스님께서 손수 쓰신 불보함(佛譜函)에 수록되어 있다. 이는 석가세존(釋迦 世尊)후, 면면히 계승되어온 제78대(曉峰學訥)와 제79대(九山秀蓮) 법손(法孫)에 해당된다. 이로써 불조심인(佛祖心印)이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오늘날까지 계계승승 전래한 것이다.>

* 경남 통영 미륵산(彌勒山) 용화사(龍華寺) 도솔암(兜率庵)에서 여름 안거를 맞이하다.

<* 산사(山寺)에 살던 사람이 어찌하다 도심 속에 살다보면 무척 산사가 그리워진다. 스님 역시 문도와 제자들의 주선으로 한려수로(閑麗水路)의 중심인 경남 통영의 미륵산 용화사로 이주하였다. 이곳은 6.25사변으로 인하여 크게 전화를 입지 않은 곳이라 승속(僧俗)을 막론 많은 피난민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비좁은 용화사 도솔암 선원이었지만 제방에서 많은 스님 들이 운집하여 신고를 같이하며 함께 정진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시자로 활연(豁然) 스님 등이 시봉하였다.>

** 1952년(壬辰年: 65세)

* 미륵산 상봉아래  "효봉대(曉峰臺) " 란 토굴을 짓고 안거하다.

<* 도솔암 선원은 많은 스님들이 운집하여 정진함으로 장소가 비좁은 탓에 스님은 용화사 뒤, 미륵산 상봉아래에 아담한 터를 잡아 삼간 토굴을 짓고서 안거하였다. 이때 일관(一觀) 스님이 출가득도하고 시봉하였다.>


** 1954년(甲午年: 67세)

* 통영 미륵산에 미래사(彌來寺)가 창건되고, 양지토굴에서 안거하다.

<* 그 당시 미륵산 용화사에는 대처승들이 살고 있었기에 용화사 암자인 도솔암이나 용화 사 뒤 토굴에서 살기란 어려움이 많았다. 그리하여 용화사 뒷산 넘어, 편백나무 숲 속에 절 터를 새로 잡아 미래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제자인 구산 스님 등 문도들의 주선으로 은사 스님인 석두(石頭) 선사를 모시고 안거하기 위해 미륵산에 걸맞은 미래사를 창건한 것이다.

어느 날 일월광명이 환히 밝은 것처럼 방광(放光)이 충천하는 곳을 찾아가 보니, 다도해의 섬들이 마치 잔잔한 호수처럼 한눈에 펼쳐지는 곳이었다. 스님은 그곳에 조촐한 삼간 토굴 을 짖고 안거하게 되었으니, 훗날 스님이 좌선하던 곳이라 하여  "효봉대(曉峰臺) " 라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미래사의 좌우 청룡과 백호 산자락 아래 음지와 양지토굴을 마련하고, 은사 석두 선사를 모시고 문도들과 함께 주석하였다. >

* 음력 4월 24일. 은사 석두(石頭) 선사께서 입적하다.

<* 스님은 은사스님과의 지중한 법연(法緣)을 생각하고 이곳 미래사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오랫동안 살고 싶었지만, 은사스님께서는 세연(世緣)이 다해 그만 입적하셨다.>


* 대한불교 조계종 종단 정화불사(淨化佛事)가 일어나다.

<* 음력 8월 17일.  "불법엔 대처승(帶妻僧)은 없다 " 란 기치아래 종단 정화운동이 일어났다. 스님은 제자인 구산 스님과 함께 상경하여 이듬해 9월까지 서울 종로구 안국동 소재 선학원 (禪學院)에 주석하였다. 대한불교 조계종 종단정화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큰집이 무너지려 하니 여럿의 힘으로 붙들어라(大廈將崩衆力扶持) "라는 유시를 내리고, 화합적인 승가정신에 입각하여 종단정화불사를 주도하였다.

이때 시자로 법정(法頂) 스님이 통영 미래사에서 수계득도하고, 서울 선학원에는 조명(照明) 스님 등이 시봉하였다.>

** 1955년(乙未年: 68세)

* 종단 정화불사가 일단락 되어가자, 다시 미래사 토굴에서 안거하다.

<* 비구 대처간의 종단분규와 정화불사가 일단 마무리되어지자, 종단 정화불사는 모든 종도 들이 여법히 수행 정진하는 것만이 진정한 화합승가를 이루는 올바른 길이라고 역설하면서 서울을 떠나 다시 미륵산 미래사 토굴로 내려 오셨다. 스님은 금강산에서부터 15여 년 동안 줄곧 오후불식과 장좌불와 등 수행자다운 모습을 잃지 않고 초지일관 변함이 없었다. 또한 여름철과 겨울철 안거의 결제와 해제를 철저히 준수하면서 후학들에게 수행의 규범을 몸소 실천해 보였다.>


** 1956년(丙申年: 69세)

* 여름 안거는 지리산 쌍계사(雙溪寺) 육조정상탑전(六祖頂上塔殿)에서 안거하다.

<* 스님은 육조 혜능대사의 사상과 조계선풍을 선양하고, 보조국사의 목우가풍을 고취하기 위해  "정진제일 효봉선사(精進第一曉峰禪師) "란 별칭을 들을 만큼 철저한 수행정신으로 일관 한 삶이었다. 가는 곳마다 육조 혜능대사의 영정(影幀)과 불일 보조국사의 진영(眞影)을 모 시고 다니면서 조석으로 예배드리고 그분들의 사상을 실천하며 몸소 생활 속에 구현하였다.

또 한편으론 대한불교 조계 종단의 원만한 정화불사를 염원하면서, 육조 혜능 대사의 정골 사리가 안치된 지리산 쌍계사 탑전 선원에서 조용히 안거하였다. 이때 시자로 법정 스님이 시봉하였다.>

* 11월. 네팔에서 개최된  "제4차 세계불교도대회 " 에 참석하다.

<* 한국불교의 정화불사와 유구한 전통을 세계의 불교도들에게 알리고 또한 그 당위성을 널리 천명하기 위해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 개최된 제4차 세계불교도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동행한 동산(東山) 스님, 청담(靑潭) 스님과 네팔, 인도(印度) 등 부처님 성지를 순례하던 도중, 귀국 길에 안내자가 그만 행방불명이 된 탓으로 불적지(佛跡地)를 어렵게 순방하고 무사히 귀국하였다. 그러나 이때 언어의 장벽을 절감했던 스님들은 귀국 후, 젊은 승려들에게 현대교육과 영어공부를 하도록 주장하고 종비생(宗費生)을 양성하였다.>


* 대한불교 조계종  "종회의장(宗會議長) "에 추대되다.

** 1957년(丁酉年: 70세)

* 1월.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總務院長) "에 추대되다.


<* 서울 조계사 경내에 총무원 청사로  "정화기념회관(淨化紀念會館) "을 건립하고 한국불교의 전통성을 천명하였다. 그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잔치에 청와대로 초대된 자리에  "생불생 (生不生) 사불사(死不死)라! 본래 생사(生死)가 없는데 어디에 생일(生日)이 있습니까? 라고 하여 이대통령을 크게 감동케 하였다.>

** 1958년(戊戌年: 71세)

* 대한불교 조계종 제3대 종정(宗正)에 추대되다.

<* 대한불교 조계종 종단 정화불사 이후 제1대 종정에는 설석우(薛石牛) 스님, 제2대 종정 엔 하동산(河東山) 스님이 추대되었으며 제3대 종정엔 이효봉(李曉峰) 스님이 추대되었다.>

* 여름 안거는 경기도 양주(楊州) 흥국사(興國寺)에 종정실(宗正室)을 마련하고 주석하다.

<* 이때 동화사에서 시자로 법흥(法興) 스님이 수계 득도하였다.>

* 여름 안거 결제부터 3년 간 미륵산 미래사 토굴에서 주석하다.

** 1962년(壬寅年: 75세)

* 4월 11일. 통합종단인  "대한불교 조계종 초대 종정 "에 추대되다.

<* 드디어 비구. 대처간의 오랜 분규가 종결되고 새로운 통합종단이 탄생되었다. 사찰관리 법에 의해 새로운 종단등록을 마치고 대한불교 조계종의 초대 종정에 추대되었다. 그리고 조계종 전국신도회 총재(總裁)에 추대되었다. 이때 통합종단인 대한불교 조계종의 총무원장 에는 송광사 출신이었던 임기산(林綺山) 스님이 취임하였다.>


** 1963년(癸卯年: 76세)

* 10월. 대구 팔공산 동화사가 종정 주석사찰로 선정되어 금당선원으로 이석하다.

<*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本寺)인 동화사가 종정스님의 주석사찰로 선정되고 스님 의 제자인 구산 스님이 동화사 주지에 취임하였다. 그리하여 통영 미래사 효봉대에 계신 종정스님을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으로 모셔와 조실스님으로 추대하고 금당선원의 미소실(微 笑室)에 모셨다. 그 후 1966년 5월 13일, 밀양 표충사로 이주할 때까지 구산 스님은 극진한 효순심으로 은사스님을 시봉하였다. 스님은 노환(老患)으로 인해 건강이 더욱 악화되자 곁에 계봉(溪峰) 노스님을 비롯하여 시자로 현호(玄虎), 달진(達眞), 지진(智眞) 등 손상좌(孫上佐) 와 청신녀 정보경화(鄭寶鏡華) 등이 시중을 들였다.>


* 말년엔  "무(無)라 노장(老長) "이란 별명이 생기다.

<* 스님에게  "무라 노장 "이란 별명이 생겼다. 항상 화두일념인 일행삼매(一行三昧)중에 자나 깨나 늘  "무 "라!  "무 "라! 하면서 선정 속에 살고 계셨기 때문. 누가 무슨 이야기를 묻더라도 항상  "무라, 무라! " 하였다. 스님은 간혹  "무라, 무라! " 하면서 손을 흔들며 춤을 추기도 하고  "무라, 무라! " 하면서 노래를 부르듯 흥겨워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시봉하던 시자가 노스님께 조용히 여쭈었다.

 "노스님! 노스님께서  "무라, 무라! " 하신 뜻이 무엇입니까? "

 "조주(趙州) 스님한테 가서 물어보아라. "

 "노스님!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

 "조주 스님도 몰랐는데 내가 알 턱이 있나? "

 "노스님! 무슨 말씀인지 더욱 모르겠습니다. "

 "너,  "이뭣고 노장 " 아니? "

 "잘 모르겠는데요. "

 "옛날에  "이뭣고 노장 "이란 스님이 있었다. 그 노장이 바로 조선시대 유명한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제자로 편양언기(鞭羊彦機) 선사인데, 한평생을  "이뭣고, 이뭣고! " 했었지. 그 누가 무어라 하고 묻던 간에 항상  "이뭣고, 이뭣고! " 했거든. 그래서 이뭣고 노장이란 별명이 생 기게 된 거야. 그 노장이  "이뭣고, 이뭣고! " 한 뜻을 네가 분명히 알 때 내가  "무라, 무라! " 한 뜻을 알 수 있어. 알겠느냐? "

 " ……  "

이렇게 스님은 노년에 이르러  "무라, 무라! " 하면서 일상삼매(一相三昧) 중에 마치 어린 아이 처럼 천진난만하게 소요자재 했다. 누구든 이  "무라, 무라! " 한 뜻을 분명히 알 때에, 나를 알 수 있고, 나를 알 때에 조주 스님을 알 수 있으며, 조주 스님을 알 때에 부처님 법을 분명히 알 수 있다고 말씀하였다.>


** 1966년(丙午年: 79세)

* 5월 14일. 경남 밀양 재약산(載藥山) 표충사(表忠寺) 서래각(西來閣)으로 이석하다.

<* 3월에는 구산 스님이 대구 동화사 주지직을 사임하고 금당선원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정진하였다. 5월에는 은사스님을 모시고 밀양 표충사 서래각으로 이석! 그때 표충사 주지에 석정(石鼎) 스님이 취임하고, 총무에는 원명(元明) 스님이 소임을 맡았다.>

* 제자 구산 스님에게 승보종찰 송광사를 중창하길 부촉하다.


<* 동족상잔인 6.25사변으로 인해 북녘 땅 출가본사(出家本寺)인 금강산 신계사에도 가지 못하고, 또 대처 비구 종단분규로 인하여 재적본사(在籍本寺)인 조계산 송광사에도 가지 못 함을 스님은 가끔 스스로 자탄하였다. 그러면서도 제자인 구산 스님에게 불법승 삼보(三寶) 가운데 승보(僧寶)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승보종찰인 조계산 송광사를 중창하여 대진선풍 (大振禪風)하길 간곡히 당부하였다.>


 
 

번호 제   목 글쓴이 날짜 조회
8 공고 수안이씨 대동보 편찬 종문수단 접수 이근태 03-12 1773
7 순도고문의 강의<曉峰스님의 一代記 03-마지막> 관리자 09-22 2371
6 순도고문의 강의<曉峰스님의 一代記 02> 관리자 09-22 2246
5 순도고문의 강의<曉峰스님의 一代記 01> 관리자 09-22 2076
4 순도고문의 강의<우리 종문을 빛낸 분들 02> 관리자 09-22 2033
3 순도고문의 강의<우리 종문을 빛낸 분들 01> 이초식 09-19 2067
2 우리의 중시조 연송님의 출생지를 아십니까? Part 1. 관리자 05-26 1769
1 우리의 중시조 연송님의 출생지를 아십니까? Part 2. [기록자료] 관리자 05-26 20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