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직무를 더 이상 지속하기 어렵기 때문에 아들 충숙왕에게 고려국을 맡기고 상왕으로서 원 에서 세계 통치의 큰 몫을 담당했다는 해석이 더욱 합리적일 것이다.

      그 증거로는 인종이 충선왕의 허락도 받지 않고 우승상자리에 임명한 사실을 꼽을 수 있다.

    “황제(인종)께서 상왕(충선왕)을 승상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상왕이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신은 소국을 맡는 일도 책임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 아들에게 전위하기를 청했는데 하물며 황실의 상상(上相)을 어찌 맡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영화를 탐내어 폐하의 밝은 지감 (知鑑)에 누를 끼치겠습니까? 감히 목숨을 걸고 주청합니다. 황제가 웃으며 이르기를 “경이 본래부터 권력을 잘 피하는 것을 안다”고 하였다. (* 임명까지는 하지 않고 제의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 글을 읽으며 ‘충선왕, 참 멋진 인간이다.’이처럼 멋진 인간이 우리 역사에서 몇 명이나 있었나. 참 마음에 드는 인물이다.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인물이기에 그를 지키기 위해 연송 조부님께서 목숨을 바친 것이 아닌가하는 느낌도 스쳐간다.

   요사이 쥐꼬리만 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도 이전투구(泥田鬪狗)하는 판인데 승상직을 거절하다니 . . .  우승상직(右丞上職)은 황실의 최고직책으로서, 천자를 돕고 만사를 총리하는 천자 다음의 자리라고 한다. 이 정도 황제의 신임을 받았다면 충선왕은 최고의 실권을 갖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하여간 충선왕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자기의 뜻을 세계에 가장 널리 실현시켰고 그런 실권을 10년 이상 가진 인물로 평가된다.  고려의 어느 왕도 그러지 못했고 고구려, 신라, 백제, 조선왕조 그 어느 분도 충선왕에 비할 만한 권력과 권세를 지녔던 분은 없었던 것이 아닌가? 

   충선왕이 이렇게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친 할아버지인 고려 원종의 뜻도 숨어있다. 원종은 세자시절 27년간 강화도에서 원나라와 항쟁한 끝에  1259년 강화조약을 맺는 데 주역을 맡은 분이다.  앞의 쿠빌라이의 말에서도 나타나듯이 강화도에 있으며 게리라 전으로 세계정복자인 원나라를 궁지로 몰았다. 우리나라가 ‘Korea’로 세계에 널리 알려진 것도 바로 이런 끈질긴 항 몽 투쟁으로 세계를 놀라게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대국들이 연달아 항복하는 데 유독 고려만이 20여년을 버티기 때문에 세계인들의 뇌리에는 ‘코레’ 가 깊이 각인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몽고와 고려의 강화조약이 비록 조건부 항복으로 평가되긴 하지만 조약내용을 보면 고려의 독립국임을 확실히 인정한다. 

 

쿠빌라이의 강화조서 내용

1. 의관은 본국(고려)의 풍속을 따라 모두 고치지 않는다.

2. 행인은 오직 몽고 조정에만 보내고 그 밖의 왕래는 모두 금한다.

3. 개경으로 옮기는 것의 늦고 빠름은 힘을 헤아려 시행한다.

4. 주둔하는 군대는 가을을 기한으로 철수한다.

5. 설치된 다루가치 일행은 모두 귀환한다.               

  중국 대륙을 지배하던 한족들도 국가 명칭을 빼앗기고 모두 몽고의 의복을 입고 몽고의 풍습을 따라야 했던 당시에 고려는 국호를 엄연히 유지하고 고려국의 의상을 입고 고유문화를 지키도록 했으며 내정간섭을 하던 다루가치를 철폐하고 군대를 고려국으로부터 철군할 뿐만 아니라 고려국의 허가 없이 아무나 입국할 수 없도록 한다. 다만 고려국왕이 징기스칸에게 가서 강화조약을 맺을 것을 조건으로 하여 원나라의 명분만을 찾자는 것이다. 강화도에서 속히 개성으로 환도하는 일에도 융통성을 첨부했다. 물론 이런 조약이 그 후 지켜질 수 없게 된 것은 몽고와 고려의 힘의 균형이 깨지게 되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국제간의 조약은 힘을 바탕으로 해야만 지켜질 수 있다는 교훈을 여기에서도 발견한다. 

   고려가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어 주체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물론 그런 측면의 조명도 필요하지만 그로 인해 가려진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본래 원나라 공주와 통혼하기를 원한 것은 고려였으며 원나라가 아니다. 원나라는 처음에 매우 망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족과 달리 몽고족은 황족의 혈통을 존중하기 때문에 다른 나라 왕실과 결혼한 일이 없었다. 결혼하면 황족이 되므로 세계통치를 위한 황족들의 권력투쟁 본게임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허나 쿠비라이는 고려국을  품에 안고 일본정복을 하려는 뜻에서인지 몰라도 몽고 역사에서 처음으로 공주를 원종의 세자 충렬왕과의 결혼을 승낙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충선왕의 존재는 몽고로서는 염려했던 존재요 고려로서는 바란 일이다. 당시 세계정세를 보면 순수 고려인으로서 세계 경영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나 고려인의 피를 지닌 충선왕과 같은 사람은 능히 할 수 있을 것으로 원종은 판단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원종의 손자가 그 뜻을 이루었다고 하겠다.

 (또한 혼혈인이기 때문에 받았던 충선왕의 아픔과 고민 그리고 이를 타개해 나아간 행적은 혼혈인이 급증하는 오늘날 우리들이 재조명할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넷째, 인간 충선왕은 문학과 풍류를 좋아 했던 임금으로 기억할 수도 있다. 충선왕이 왕후와의 불화를 빗대어 ‘바람둥이 가정에 바람 잘 날 없다’는 평가를 하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충선왕의 여자관계는 오늘날 우리의 잣대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당시의 관습을 고려해야 

니라 당시의 관습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충선왕이 문학에 취미 가 있은 듯도 한 것은 유교를 신봉하는 선비들의 공통점으로도 이해된다. 하지만 문학에 심취하여 현실 정치에서 초연한 공상가에게 막중한 제국의 승상을 맡기기로 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더구나 인종은 충선왕의 인품과 능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이 이런 두뇌의 소유자라는 것은 이미 18세 때도 나타난다.  

   1292년 세자가 18세 때 원나라에서 합단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우고 식량원조까지 받고돌아 와서는 3일 동안 거리에서 죽을 끓여 굶주린 자에게 먹이도록 했다.

   백성들은 세자가 궁궐 밖으로 행차할 때면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세자가 탄 말이 앞으로 가지 못할 정도였다.

“세력 있는 권력자들이 남의 전민(田民)을 탈취하는데도 관리가 처리해 주지 못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세자는 이들의 불만을 해결해 주었다고 한다.

  이때쯤이면 세자가 백성들의 마음 얻는 전시효과적인 행사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충선왕은 어린 세자시절부터 백성을 위하고 일을 바르게 처리해야 한다는 신념은 매우 두터웠다

 아홉 살 때 왕은 혜진 베옷을 입은 사람이 땔나무를 지고 궁궐문에 들어 가는 것을 보고 ...

“나는 좋은 의복을 입고 있는데 백성들의 형편은 저러하니 내 마음이 어찌 편안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어느 날, 궁노가 동리아이들의 연을 빼앗아다가 왕에게 바쳤더니 왕이 묻기를 “네가 이 연을 어디에서 얻어왔느냐?”라 한 즉 궁노가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남의 물건을 빼앗아다가 나에게 바치는가?”고 책망하고 곧 돌려주라 명하였다.

 1288년 14세 때의 이야기다.  황제의 생일 축하연때, 취흥에 겨워 “세자를 불러오라” 했으나 세자는 이를 거부해 내시 원혁(元 奕)이 세자를 무릎에 앉히고 조용히 타일렀다.

‘임금은 너무 밝게 살피면 안 됩니다. 세자께서는 총명이 너무 지나치시니 조금 관용하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세자는 화를 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가 나를 어리석게 만들어서 손바닥 위에 놓고 물렁물렁한 떡을 주무르듯이 하려고 드느냐?’ 라고 하니 원혁이 두려워하였다.

  충선왕이 왕위에 오른 후 에 발표한 개혁 정책은 세계적인 정치인답게 합리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그 여러 가지 정책 중에서 필자의 21대 조부님(이연송)의 행적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