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발견논단

 
작성일 : 09-09-19 11:24
순도고문의 강의<우리 종문을 빛낸 분들 01>
 글쓴이 : 이초식
조회 : 5,051  
   宗門을 빛낸분 순도.hwp (40.5K) [2] DATE : 2009-09-19 11:24:20

순도고문님께서 사이버 용계강좌 <수안이씨 지도자 과정>에서 강의하신 내용을 아래와 같이 보내 주셨습니다. 

遂安李氏  宗門을 빛내신 분들


※ 始祖 諱 堅雄

우리 遂安李氏 始祖는 京山(지금의星州)분으로 918年에 王建을 高麗太祖로 추대하고 太祖을 도와 甄萱(견훤)을 토평하는데 공을 세우시어 .統合三韓 壁上功臣에 올으고 벼슬이 平章事(평장사)의 官職(관직)을 두루 역임 하셨음니다. 

그後 여러世에 이르는 列世祖가 高麗朝의 平章事. 司空. 監察御使. 尙書.  承旨 등의 高等   官職을 두루 지내셨습니다.

★二世이신 諱 長碩(휘장석)은 三重大匡 門下待中 平章事兼 左政承을지내셨고

★三世이신 諱 彬(빈)은 光宗朝元年 戊午에 文科의 科擧를 施行하니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科擧制度를 만들어 實施하계 되였으며 벼슬이 金紫光祿大夫 直內史守 司空 門下侍中에  이르다.  

문하시중

★四世이신 諱 端은 左僕射內史平章事를 지내셨고 관직에서 물어난 후에도    國家大事가 있을 때마다 登廳하시어 國事를 議論하시다 돌아가시니 文忠    公의 諡號(시호) 를 내리셨다.

★五世이신 諱 象先은 監察御使를 歷任하시었으며

★六世이신 諱 威는 吏部侍郞을 지내시면서 宋나라에 方物을 보내거나 禮를    갖추는 일을擔當하였을 뿐만 아니라 醫學이나 藥學을 전해주는 業務를 맡    아보셨다.

★七世이신 諱 景忠은 麗朝 獻宗時 御名을 出納하는 閤門祗侯(합문지후)兼 나   라에 큰 儀式 즉 祭祀나 贈諡(증시)등의 일을 管掌하는 儀典寺事를 역임 하셨다

★八世이신 諱 公隣은 高麗仁宗朝時 翰林內承旨 를 거처 殿中內史라는 內議   省에 屬하는 벼슬로서 詔書와 大闕안에 일어나는 일을 모두 記錄하는 顯職   을 지냈으며

★九世이신 諱 竦(송)은 文科에 及第하여 벼슬이 正二品인 三重大匡 平章事   에 올르시다.

★十世이신 諱 師德은 明宗때 文科에 及第하여 벼슬이 門下平章事이 었으며

★十一世이신 諱 晋은 麗朝 高宗때 文科에 及第하시어 兵部尙書을 지내시다.

★十二世이신 諱 承順은 秘書盤을 거처 元宗때 光祿大夫를 지냈으며 司空벼   슬에 까지 오르시니 品階가 正一品이시다.





※ 中始祖   諱 連松 (득관조)

中始祖이신 十三世 諱 連松祖는 字 栢心 號 龍溪이시다. 忠烈(충렬), 忠宣(충선), 忠肅(충숙) 三王朝에 여러 官職(관직)을 歷任하시어 三重大匡(삼중대광)太師(태사) 平章事(평장사) 戶部尙書(호부상서)등의 高位官職을 두루 歷任하셨으며 忠肅王朝時(충숙왕조시)元朝(원조)의 大亂(대란)때 元請援(원청원)에 援軍奉(원군봉)하여 元皇帝(원황제)가 후한 金品과 벼슬을 내리려 하자 公은 이를 固辭(고사) 하시고 대신 糧穀(양곡)을 要求하여 四十萬石의 糧穀을 얻어와서 數星霜 凶年 (수성상흉년)의 百姓을 救恤(구휼)하였으니 功臣特賜(공신특사)로  遂安郡의 領主(영주)로 봉해지셨습니다. 이에 후손들이 수안을 本貫으로 삼아 世系를 繼承하게 되였습니다.

그리고 中始祖께서는 文武을 겸한 賢臣으로 사재를 털어 황해, 평안 각 고을에 향교를 세우고 經書(경서)등을 刊行(간행)하며 유학 보급에 앞장 스시어 肅宗(숙종) 三十四年에 國王게서 特下賜(특하사)額號로 龍溪書院하시고 禮曺官 洪尙賓(홍상빈)으로하여頌額(송액)의 禮을 내리셨습니다.

★十四世이신 中始祖의 長子이신 諱 庥(휴)公는 典理判書 三重大匡 平章事의 벼슬을 지냈으며 先父 遂安君의 代을 이어 遂安君에 封爵(봉작)되였습니다.

※高麗 時代에 平章事를 지낸 諱 端(단)과 諱 威(위), 三重大匡 平章事(삼중대광평장사)를 歷任(역임)하고 文武(문무)를 겸비한 賢臣(현신)으로 추앙받은 連松(연송)中始祖 등이 우리 宗門의 기틀을 다진 人物입니다.

※ 諱 仁祐祖

十八世孫 仁祐祖는 高麗朝의 將軍으로 벼슬은 知密直三司副使兼左將軍(지밀직삼사부겸좌장군)으로

宣城(선성)의達魯花赤(달로화적)과連祥(연상)의亂(란)을 討伐(토벌)하는 싸움에서 세 번씩이나

크게 勝戰(승전)하였으나 後援(후원)이 따르지 못하여 壯烈(장열)하계 戰死(전사)하시었습니다.

역전의 무공을 세웠으나 屍身도 수습하지 못하고 愛馬가 신발을 물고 돌아와 신발을 安葬하였다고 하며 追遠祠(추원사)를 건립하여 春秋로 奉享하고있습니다.


★ 이 박에 高麗朝 人物로는 李長碩(이장석)左政丞(좌정승) 李彬(이빈)司空(사공) 李(端(이단)文忠公(문충공) 李象先(이상선)監察御使(감찰어사) 李威(이위)侍郞(시랑) 李公麟(이공린) 承旨(승지) 李竦(이송)平章事(평장사) 李師德(이사덕)平章事(평장사) 李晋(이진)尙書(상서) 李承順(이승순)秘書監(비서감) 李庥(이휴)遂安君 李完(이완)遂安君 李伯欣(이백흔)府使(부사) 李徵(이징)署令(서령) 李觀(이관)按廉使(안렴사)을 들수있습니다.


※ 尊庵公  諱 遂生

遂生祖는 字는 明仲이요 號는 尊庵(존암)이다 十九世이신公은  杜門洞 七十二賢의 한분이시고 開城에 七十二賢祠堂이 있으며 不事二君의 志操를지킨 高麗朝의 忠臣으로 墓所(묘소)는 수안에 있습니다.  最近 江原道 旌善郡 樂同面 居七賢洞에 七十二賢中 七賢 (全五倫 金仲漢 高天祐 李遂生 申晏 邊貴壽 金瑋)을 기리는 七賢碑가 建立되엿으며 每年가울에 七賢祭를지내고 있습니다. 民謠 정성아리랑은 이분들의 한맻힌 삶에서비롯되엿다고 합니다.

公은 世宗때 吏曹參議(이조참의)를 除授(제수)하였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습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40여명이 관계에 進出하였으며. 그중 가장 두드러진 분은 中宗反政正의 功으로  吏曹判書와 兵曹判書를 역임한 諱 夔(기)와 工曹判書 諱 安貴公 武人으로 두각을 나타낸 李繼宗祖 李斗鉉祖, 선조 때 효자정문을 받은 李福長祖 등이 있읍니다.



※諱 安貴祖

公은 世宗朝에 문과에 급제하시고 文宗. 端宗을 내리섬기며 淸官顯職(청관현직)을 거처 資憲大夫 工曹判書에 일르렀다. 死六臣(사육신) 朴彭年(박팽년)과 親交가 있어   世祖元年에 死六臣을 辯護(변호)하는 上疏(상소)를  올였다가  罷黜(파출)당하고 마침내 成川府의 大谷面 鶴洞으로 流配(유배)되여 이곳에 定着(정착)하였다.

公은 流配生活을 하면서도 家財를 털러 주민의 十年간 勞役(노역) 을 면하게 하고 忠義(충의)와 禮節(예절)로 後進들을 敎導(교도)하였으니 모든 사람들이 感化(감화)하고 선비들이 公의 學問(학문)을 崇尙(숭상)하여 모든 百姓(백성)들의 생활이 泰安(태안)하여 오래도록 공을 기리며 사모하였다.



※諱 夔 遼山君

諱 夔 遼山君은 (遼山郡은지금의遂安郡) 燕山君의 虐政(학정)이 심하여 民生이 塗炭(도탄)에 빠지자 柳順汀(류순정) 朴元宗(박원종)等과 모의하여 燕山君을 몰아내고 中宗을 擁立(옹립)하는데 成功(성공)하여 純忠奮義翊戴靖國功臣(순충분익대정국공신)의으로 遼山君을 封하시고 資憲大夫 兵曹判書에 除授되었다.  그後 明宗때 進賀使(진하사)로 明나라에 다여왔다.

末年에 忠南보령에 落鄕하여 새로운 遂安李氏의 터전으로 만들었으며 생전에 吏曹判書와 兵曹判書等의 顯職을 두루 거친 忠臣으로 忠南보령에 遼山祠를 세워 享祀(향사)케 하고있다.


※諱 繼宗祖

繼宗祖는 二十五世孫으로 雲山郡守 在任中 光海君 十年에 遼東출병에 참가 하셨습니다.

이는 조선 초기에,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명나라 군사와 협력하여 만주 남쪽 建州地域에 거주하던 女眞族을 정벌한 戰鬪이며 武官으로 雲山郡守 在任中 1618年에 지금의 滿洲 建州衛을 征伐하려 左營中軍千總으로 當時 宣川郡守 金應河 將軍과 아우 繼賢公과같이 出征 力戰奮鬪하다 兄弟분다같이 戰死하셨습니다. 

公은 먼 遼東 땅에서 戰死 하셨기 때문에 屍身은 수습하지 못하였고 忠烈祠가 있으며 祠堂아레 薺室에서 春秋로 祭를 올리고 있습니다.

祠堂앞 큰길가에 神道碑(從二品이상의官員에한함)가 있고 여기서 約1km 떨어진 곳에 말 무덤이 잘 造成되여 있습니다,

전하여 내려오는 바에 의하면  愛馬가 公의 網巾(망건)을 물고 집에까지 왔다고 하는데 사실인지 알수는 없으나 말 무덤이 있는 것으로 보아 歸巢本能이 강한 名馬이면 돌아 올수도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諱 福長公

福長公은 文武(문무)을 兼한 분으로 退溪(퇴계) 李滉先生의(이황선생) 門下生으로 修學하여 禮學(예학)을 배웠고 宣祖(선조)때 禮學이 高明(고명)하여 禮賓寺(예빈사)參奉(참봉)을 除授(제수)하고

임진왜란 때 並川(병천)의 鵲城山(작성산)에서 왜병을 대파하여 큰 功을 세웠으며 忠義孝烈錄(충의효열록)에 수록된 當代의 충신이시며 孝子이십니다. 천안시 병천면 梅城里(매성리)에 孝子門旌閣(효자문정각)과 守城之址事跡碑(수성지지사적비가) 建立(건립)되어 있으며 地方文化財로 指定(지정)되여 있읍니다.


※諱 時恒公

公은 小時부터 文才가 있어 八歲때 鄕試(향시)에 壯元(장원)하여 監事유상원을 뵈울수 있었으며 二十四歲에 進士가 되시고 二十七歲에 大科에 及第하여 典籍義禁府都事(전적의금부도사). 禮曺(예조). 兵曹正郞(병조정랑). 春秋館編修官(춘추관편수관)을 歷任하시고 泰川.德川郡守를 지내셨다. 公은 暗行御史(암행어사)의 모함으로 黃海道, 平安道, 咸境道 등 西北人 들에 향후 30년간 과거에 등과할 수 없도록 건의해 조정에서 논의되자 이에 격분하여 유림들과 더불어 시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것이 關西辨誣疏(관서변무소)로 당대의 名文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상소로 숙종은 관서인차별을 철회하도록 했으며 時恒公은 관서인 들로 부터 추앙을 받았으며 國防에도 識見이 있어 請修中嶺關防疏(청수중령관방소)를 올렸으며 公은 和隱集(화은집), 關西通誌(관서통지), 西京詩(서경시), 金將軍遺事(김장군유사)등 20여권의 저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 諱 李東仁

東仁公은 고향이 황해도 수안이며. 韓末(한말)의 開化僧(개화승)으로 일찍이 개화사상에 눈을 떠 일본으로 밀항하여 일본정계의 거물들과 친교를 맺고 돌아와 金玉均(김옥균), 金弘集(김홍집) 등과 더불어 기울어가는 국운을 바로잡기 위해 많은 힘을 기울였읍니다. 1881년 紳士遊覽團(신사유람단)이 출발할 때에는 참모역을 담당하였으며 1882년 한미수호조약의 조문은 그가 미리 초안해둔 것을 기준으로 할 만큼 큰 영향력을 행사한 정계의 실력자 였다합니다.



※ 李喜儆 醫學博士

평안남도 順川(순천)出生으로 1904年 美國(미국)으로 건너가서 醫學(의학)을 전공한 뒤 박사학위를 획득하고 1915年 하와이에서 病院(병원)을 개설하여 애국동지들을 원조하며 광복운동을 계획하였다.

1918년 1월에 귀국하여 그해 12월에 상해로 망명하여 上海 臨時政府에서 1919년 5월 13일에 제4회 임시 의정원 회의에  평안도 대표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같은 해 7월에는 徐丙浩(서병호)·安昌浩(안창호)와 협의한 결과, 내무부의 인가를 받아 대한적십자회를 발족시켰으며, 8월 20일에 거류민단사무소에서 적십자 常議會(상의회)를 개최한 뒤 초대 회장에 선임되었다.

1921년 5월 7일에는 다니며 진정서를 전달하는 등 적극적인 외교 공세를 벌였다. 1921년 5월 7일에는  臨時政府 외무장 겸 외무총장 대리로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그는 또한 1921년 4월에 모스크바에 파견되어 安秉瓚(안병찬)·張健相(장건상)·王三德(왕삼덕) 등과 독립운동자금 확보 및 외교활동을 벌이고 北京(북경)을 거쳐 상해로 돌아왔다. 그는 "레닌"이 독립운동 자금 명목으로 기증한 40만 루불을 이동휘의 비서인 金立(김립)이 유용한 사실 등으로 임시정부에 내분이 일어나게 되자 실망하여 1923년 1월 독일의 베르린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 1935년 10월 20일에는 미국제약회사의 동양특파원을 가장하고 귀국하던 중, 일본에서 체포되어 국내에 압송되었다. 그는 압송도중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병으로 신음하다가 1941년 6월에 서울에서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1968년에  建國勳章(건국훈장) 獨立章(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國立墓地 獨立有功者 墓域 (국립묘지 독립유공자묘역)에 安葬 되었습니다

1920년 7월 제5회 의정원 회의에서 초대 군무위원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19년 1

평안남도 順川(순천) 出生으로 千九百四年 美國(미국)으로 건너가서 醫學(의학)을 전공한 뒤 박사학위를 획득하고 千九百十五年 하와이에서 病院(병원)을 개설하여 애국동지들을 원조하며 광복운동을 계획하였다. 千九百十八年 1月에 귀국하여 그해 十二月에 상해로 망명하였다.

中國 上海 臨時政府에서 金九 주석을 도와 初代 赤十字會長을 歷任하면서 積極的(적극적)인 獨立運動을 하신분 그當時 풍족한 생활이 보장된 醫師이면서도 異域萬里 中國땅에서 同族의 診療(진료)을 하면서 獨立運動으로 一生을 마치신 분입니다.

정부에서는 공적을 인정하여 년千九百六十八年에 建國勳章(건국훈장) 獨立章(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國立墓地 獨立有功者 墓域 (국립묘지 독립유공자묘역)에 安葬 되었습니다.


 
 

번호 제   목 글쓴이 날짜 조회
8 공고 수안이씨 대동보 편찬 종문수단 접수 이근태 03-12 4619
7 순도고문의 강의<曉峰스님의 一代記 03-마지막> 관리자 09-22 5420
6 순도고문의 강의<曉峰스님의 一代記 02> 관리자 09-22 5511
5 순도고문의 강의<曉峰스님의 一代記 01> 관리자 09-22 5118
4 순도고문의 강의<우리 종문을 빛낸 분들 02> 관리자 09-22 5104
3 순도고문의 강의<우리 종문을 빛낸 분들 01> 이초식 09-19 5052
2 우리의 중시조 연송님의 출생지를 아십니까? Part 1. 관리자 05-26 4637
1 우리의 중시조 연송님의 출생지를 아십니까? Part 2. [기록자료] 관리자 05-26 48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