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발견논단

 
작성일 : 09-09-22 11:51
순도고문의 강의<曉峰스님의 一代記 03-마지막>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371  

★*  "병상(病床)의 효봉 스님 " 이란 조선일보의 기사를 읽고 뜻밖의 편지가 오다.

<* 9월 29일. 조선일보 신문에  "병상의 효봉 스님 "이란 기사를 읽고 보냈다는 뜻밖에 편지가 표충사로 날아왔다.  "표충사 석봉(石峰) 스님 존하 " 란 한 통의 편지에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스님의 출가 전 가족관계와 함께 많은 사연들이 담겨져 있었다. 이는 실로 충격적인 편지였다. 왜냐면 스님은 출가 이후, 스님 스스로 과거에 대한 사실을 좀체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스님은 지금까지 본적은  "평양부(平壤府) 진향리(眞香里) 54번지 "요, 스님의 본명은  "이원명 (李元明) "이라 하였다. 그리고 스님의 출가전 이야기들은 다 전생사(前生事)요, 몽중사(夢中 事)라며 입밖에 담지 않았다. 하기에 스님의 별명들이 말해주듯 스님은 일찍이 조실부모한 고아로써 줄곧  "엿장수 중 "이라 했으며  "절구통 수좌 "니,  "판사 중 "이니,  "무라 노장 "이니 하는 별명들이 생겼다.

스님은 일찍이 한국인 초대 판사로써, 송광사 삼일암 선원의 조실 스님으로써, 해인사 가야 총림의 방장스님으로써, 대한불교 조계종의 종정으로써 근세 한국불교 중흥에 있어서 많은 공적을 남겼지만, 주위에 사람들은 스님을 그런 존칭보다도 더욱 친근하게  "엿장수 중 " 이니,  "판사 중 " 이니,  "무라 노장 " 이란 별명으로 통칭해 왔다.

그런데 이게 어인 일인가! 스님의 출가전의 내력을 자상히 알 수 있는 뜻밖의 편지 한 통이 날아든 것. 이는 정말 상상 밖의 일이었다.

* 훗날 스님의 생애를 살펴보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리라 사료되어, 그 편지 내용을 그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除禮하옵고

生面不知의 사람으로부터 書信을 받게되어 의아하게 生覺하실 것입니다.

多忙中이라 思慮하와 要件만 말씀드리고저 합니다.

九月 二十九日字 朝鮮日報에 보도된  "病床의 曉峰스님 "을 읽고 小生의 祖父님과 一致하는 点 이 있어 아뢰오니 다음 事實을 參考하셔서 確認해 주시면 大幸이겠습니다.

一. 曉峰스님께서 四十三年前에 두고 떠났다는 두 아들의 姓名이 李永發(長男), 李永實(次男) 이 아닌지요?

二. 小生의 本貫이 黃海道 遂安(稀本)입니다.

三. 李炳億氏는 小生의 曾祖父이시며, 曉峰스님이 李炳億氏의 五男妹中의 三男이라 하셨는데 혹 五兄弟中의 三男이 아닌지요?

四. 曉峰스님의 俗名이  "李燦亨 " 氏가 아닌지요?

五. 李永發氏는 (尙今在日中) 小生의 父親이며 어렸을 때 記事內容과 같은 祖父님의 말을 자 주 들었습니다.

六. 平壤覆審法院에 계셨다는 말도 一致합니다.

七. 祖母님은 二年前에 別世하셨는데, 今年 八十一歲가 되며 이름은  "朴賢 "입니다.

以上 參考로 말씀드리오며 事實이기를 仰望하는 小生의 마음 초조하오니 힘써 도와 주시 면 감사합니다.


一九六六年 十月 四日

서울에서 小生 李仁穆

表忠寺 石峰스님 尊下

<* 이상과 같은 편지내용이었다. 편지 뒷면에는 가족의 관계를 상세히 알 수 있는 가계표 (家系表)까지 첨부하여 있었다. 이 뜻밖의 한 통의 편지로써 스님의 출가전 일들에 대해서 추측만 난무했던 사실들이 분명히 밝혀지게 된 것이다.

뒷날 친지들에 의해 알게된 일이지만 스님의 형제들의 이름은 준형(遵亨: 장남), 만형(萬亨: 차남), 춘형(春亨: 4남), 여동생은 탄실(誕實)이었고 5남매(五男妹)중 3남(三男)이었다.>


* 출가 입산 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혈육인 장손(長孫)과 상봉하다.

<* 그 당시 조선일보를 보고서 편지를 발송한 날이 10월 4일이요, 이 편지가 밀양 표충사에 도착한 날이 10월 10일이니, 스님이 입적하기 5일전의 일이었다. 이 뜻밖의 편지를 받아 본 구산 스님은 편지내용들을 확인하기 위해 보성 스님을 급히 서울로 보냈다. 그리고 이틀 후, 10월 12일 밤. 스님과 꼭 닮은 장남 이영발 거사의 사진을 들고 스님의 장손이라며 이인목 (李仁穆)거사와 그 가족들이 표충사에 찾아 왔다. 생면부지의 손자와 손부(孫婦), 증손(曾孫) 까지 데리고 와 할아버지를 찾아뵙게 된 것. 스님은 출가 입산 후, 처음이자 마지막인 혈육 간의 극적인 상봉이 이루어지게 된 셈이었다. 할아버지와 손자간의 뜻밖의 상봉으로 긴장된 하루 밤을 보낸 이들은 일본에 체류중인 아버지에게 급히 연락을 취한다고 10월 13일 아침 일찍 상경하였다.

스님의 장손 가족들이 왔다 간 후, 더욱 기막힌 사연들이 가슴 아프게 하였다. 스님은 출가 이후 전남 순천(順天) 송광사에 살았고, 장남인 이영발(李永發: 覺幻) 거사는 남북전쟁인 6.25사변이 일어나자 어머니를 모시고 곧 바로 월남하여 송광사와는 지척인 전남 광주(光州) 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광주와 송광사와는 지척인데도 그 오랜 세월동안 서로 모르고 살았 다니, 이 무슨 기구한 운명이란 말인가? 그리고 모친께서는 2년 전 광주에서 한 많은 생을 마치고 별세하였다니, 이 어찌 한편의 비극이 아니랴!

그 뿐만이 아니었다. 스님은 입산 후, 평생을 두고 스님의 본적과 성명, 가족관계 등 세속적 인 것에 대해선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세속을 저버린 승려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써 어찌 그럴 수가 있었을까! 이런 스님에게 출가 전 본적과 성명, 가족관계들이 상세히 밝혀졌으니 어찌 놀라지 않았겠는가! 스님도 깜짝 놀랬고, 제자들도 모두 놀랬다. 이는 한 막의 비극인 동시에 엄연한 현실이었다. 6.25사변으로 인한 민족분단의 역사와 함께 남북 이산가족의 한 맺힌 희비쌍곡선이었다.

지난 날 금강산 온정리 과수원 밭 여여원 선원에서 우연히 신혼여행 온 듯한 아들의 모습을 보자마자 정진하던 자리를 옮겨 면벽하던 때는 도심(道心)이 인정(人情)을 등진 듯하더니만, 오늘 밀양 표충사 서래각에서 뜻밖의 장손과의 상봉은 도심과 인정이 하나임을 보여줌인가?

손자와의 극적인 상봉이 있고 난 후, 스님의 안색은 상기된 모습이었지만 더욱 밝아 보였다. 하지만 세연(世緣)이 다한 듯한 예감을 곁에서도 느낄 수가 있었다.>


* 시자의 간청에 의해 임종게(臨終偈)를 읊다.

<* 할아버지 스님 곁에서 하룻밤을 보낸 장손들은 조부님의 상봉소식과 조부님이 생존해 계신다는 사실을 일본에 체류중인 아버지에게 급히 연락해야 한다면서 아침 일찍 떠났다.

하지만 꿈과 같은 혈육의 상봉으로 무어라 형용키 어려운 심경인양 스님은 더욱 자주자주  "무라, 무라! "를 되새기곤 하였다. 이를 곁에서 지켜본 시자가 노스님께 조용히 여쭈었다.>

"노스님! 가시기 전에 한 말씀 안 하시렵니까? "

 "난 그런 군더더기 소리 안 하련다. "

 "왜요? 노스님! 그래도 한 말씀 하셔야죠? "

 "지금껏 한 말들도 다 그런 소린데... "

 " ……  "

<* 스님은 손에 들고 있던 단주를 굴리면서 한참이나  "무라! 무라! 무라... " 하더니, 조용히 게송을 읊었다. 그리고 천진난만한 어린애 마냥 환한 미소를 지으셨다. 하지만 이것이 스님 의 열반송(涅槃頌)이 될 줄 누가 알았으랴!>


吾說一切法 都是早騈拇

若問今日事 月印於千江


내가 말한 모든 법

그거 다 군더더기

오늘 일을 묻는가

달이 일천 강에 비치리.


* 10월 15일(음력 9월 2일) 새벽 3시. 문득 제자인 구산 스님을 찾다.

<* 새벽 3시. 도량석 목탁소리가 재약산 골짜기에 은은히 울러 퍼지고 있었다. 이때 스님은 시자실에 있던 시자를 찾았다.>

 "거기 누구 없느냐? "

 "예, 노스님! 여기 호랑이 있습니다. "

 "응, 그래. 너희 스승 모시고 오너라. "

 "예, 노스님! 스님을 모시고 오겠습니다. "


<* 평소 스님은 손상좌인 시자를 애칭으로  "호랑이 "라고 즐겨 불렸다. 이때 시자는 노스님의 옆방 시자실에서 밤을 지새우며 노스님의 행장과 연보를 정리하고 있었다. 왜냐면 전날에 잠시 출타하였다가 향곡(香谷)스님 회상인 월내 묘관음사(妙觀音寺)에 들렸는데, 노스님께서 입적하는 생생한 꿈을 꾸었기 때문이었다. 하도 기이하고 생생한 꿈이었기에 급히 표충사로 달려와 은사인 구산 스님께 지난밤 꿈 이야기를 말씀드리고, 시자실에서 노스님의 일대기를 정리하고 있던 참이었다.

시자는 노스님을 편한 자세로 앉도록 부축해 드리고, 건너 방에 계시던 은사 구산 스님께 노스님께서 찾으신다고 말씀드렸다. 이내 계봉(溪峰) 노스님과 은사스님, 그리고 시봉들이 다 모여 노스님께 문안 인사를 드렸다. 곁에서 보기에도 노스님께선 이미 세연(世緣)이 다 한 듯 싶었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노스님께서 조용히 말문을 여셨다.>


 "나, 오늘 갈란다. "

 "예? 스님!

언제쯤요? "

 "오전에 가지! "

 " ……  "

<* 스승과 제자인 구산 스님간에 짤막한 문답이 오고갔다. 형언할 수 없는 침묵이 무겁게 흐르고 있었다. 싸늘한 새벽공기가 무거운 정적과 함께 옷깃을 여미게 했다. 숨소리조차도 멈추어 버린 고요함 그 자체였다. 적정삼매(寂靜三昧) 속에 잠겨 있는 듯한 은사스님께 제자 는 가끔 여쭈었다.>

 "스님! 화두(話頭) 들리십니까? "

 "응, 응... "


고개를 살며시 끄덕이던 스님의 모습.

내내 곁을 지키고 있던 제자는 조용히 다시 묻는다.

 "스님! 지금도 성성(惺惺) 하십니까? "

 "무라, 무라, 무라! "

 " ……  "

<*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통하는 스승과 제자와의 대화만이 오고갔다.

이 엄연한 꿈과 현실! 어떤 것이 꿈이고 어떤 것이 현실인지? 지난밤 꿈에 생생히 지켜봤던 노스님의 임종 장면이 엄연한 현실로 재현되고 있었다. 꿈과 현실이 하나되어 생생하게 눈 앞에 전개되고 있었다.

스님이 계시던 서래각엔 새벽부터 정적만이 계속 엄습하고 있었다. 그러나 표충사 종무소엔 대한불교 조계종 종정 효봉 대종사의 임종 소식을 알리기 위한 문도들의 발걸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一九六六年 10월 15일(음. 9월 2일) 오전 10시 정각! 입적(入寂)하다.


<* 새벽 3시부터 줄곧 가부좌하신체 앉아 계시던 스님의 자세가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했 다. 스님의 고개가 약간 옆으로 기울러졌다. 바로 그 순간!

가부좌하신체 정진하던 자세로 그만 입적하신 것이다.

마치 생전에 눈을 지그시 감고 고요히 선정삼매(禪定三昧) 속에 정진하고 있는 듯한 스님의 모습 그대로였다.

둥 둥 두~웅…….

108번 열반종소리가 표충사 도량에 울려 퍼졌다.

효봉 스님의 입적 소식이 108번의 열반종소리와 함께 재약산 골짜기를 넘고 넘어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 때마침 이 날은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추계재향일(秋季祭享日)! 구국성사인 사명대사의 진영을 모신 밀양 표충사에서는 매년 봄가을로 밀양군의 군관민과 종립학교 학생들이 함께 추모법회를 거행하는 날이었다. 오전 10시 정각, 108번의 열반종 소리가 도량에 울려 퍼지기 시작하자 도량에 운집했던 많은 사람들은 사명대사의 재향 법요식이 시작되는 종소리인줄로 알았다. 그러나 뜻밖에 효봉 스님의 입적을 알리는 열반종이라고 하니, 법당 앞 광장에 모인 사부대중은 먼저 효봉 스님 입적에 대한 묵념부터 올렸다.

이렇게 스님은 가신 것이다. 본래 오심 없이 왔다가 가심 없이 가신 것이다.

파란만장한 80생애를 우리 민족의 질곡의 역사와 함께 살다가 가신 것이다. 청산유수(靑山 流水)와 청풍명월(淸風明月)처럼 그렇게 살다 가신 것이다. 집착 없이 살다 자취 없이 가심 이 스님의 생애(生涯)였고, 동체대비(同體大悲)로 인연 따라 소요자재하게 살다 가심이 스님 의 행장(行狀)이었다.

스님의 생애와 행적이 모든 종도(宗徒)들의 귀의처가 되고, 모든 불자(佛子)들의 귀감이 되 어 영원히 상주불멸(常住不滅)하리라.

지금도 스님의 당당하고 천진난만한 자용(慈容)이 눈에 선하고, 스님의 입적을 알리는 밀양 표충사의 열반종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이때 스님의 세수(世壽)는 79세요, 법납(法臘)은 42년이었다.>


* 10월 21일(음력 9월 8일). 서울 조계사 총무원에서 종단장(宗團葬)을 봉행하다.


<* 스님께서 입적한 후, 문도들은 산사(山寺)에서 조용히 입적하신 스님이기 때문에 영결식 (永訣式) 역시 산사에서 조촐하게 거행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하였다. 그러나 총무원 임원스 님들은 한사코 통합종단의 초대 종정스님의 영결식이기 때문에 서울 조계사 총무원에서 성 대히 거행해야 한다고 서로 주장하였다. 결국 이틀 후, 서울 조계사로 운구하여 7일 종단장 으로 거행하게 되었다. 조계사의 법당 앞 광장을 전국에서 운집한 사부대중으로 꽉 메운 가 운데 장엄한 영결식을 봉행하였다.

영결식이 끝난 후, 장례행렬 역시 서울 종로 네거리를 길게 누비는 보기 드문 장관이었다. 다비식(茶毘式)은 서울 수유리 도봉산 화계사(華溪寺) 뒷산의 다비장에서 사부대중의 애도 속에 엄숙히 봉행하였다.

다비식을 밤 새워 지켜본 많은 사람들은 오색광명(五色光明)이 밤하늘을 찬란히 수놓으며 방광(放光)하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스님의 거룩한 생애와 법력(法力)에 다시 한번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다음날 오전, 종단의 원로스님과 문도들이 함께 습골(拾骨)하여 사리(舍利)를 수습하니, 오색 영롱한 쇄신사리(碎身舍利) 55과(顆)와 전신사리(全身舍利)가 한 되(一升) 가량 출현하였다. 조계사 법당에선 스님의 사리 친견법회 등을 개최하고 스님의 거룩한 생애와 사상이 모든 언론매체를 통해 사회 각계각층에 널리 알려지게 되자, 당시 침체된 한국 불교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재도약의 활력소가 되었다.>


* 스님의 인연터 마다 사리탑(舍利塔)과 행적비(行蹟碑)를 건립하다.


<* 밀양 표충사에서 스님의 49재 법요식을 봉행한 후, 표충사 서래각 뒤편 산록에 자연거석 (自然巨石)을 옮겨 와 스님의 사리탑으로 천진보탑(天眞寶塔)을 건립하였다.

이듬해인 1967년(丁未年) 4월 15일! 하안거를 기해 스님의 부촉과 유훈에 따라 구산 스님을 비롯하여 많은 문도들이 승보종찰 송광사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송광사의 주지였던 취봉(翠峰) 스님의 간곡한 청원으로 구산 스님은 취봉 스님과 뜻을 같이하여 송광사를 옛 동방제일도량인 승보종찰답게 중창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 후, 스님의 유훈과 가풍을 계승하리라는 문도들의 간절한 발원으로 스님의 승적 본사인 조계산 송광사를 비롯해 미륵산 용화사와 미래사에 각각 스님의 사리탑을 세우고 행적비를 건립하였다.


* 스님의 유촉에 따라 승보도량 조계산 송광사에 조계총림(曹溪叢林)을 설립하다.

<* 1969년(己酉年) 4월 15일! 마침내 하안거 결제일을 맞이하여 승보종찰인 송광사에 종합수도원인 조계총림이 설립되었다. 가야산 해인사에 설립된 대한불교 조계종 제1총림인 해인총림(海印叢林)에 이어 제2총림으로 조계총림이 설립된 것이다.

전국 수좌 모임인 선림회(禪林會)의 노력으로 중앙종회의 의결을 거쳐, 조계총림 설립위원장에는 청담(靑潭) 선사가 추대되고, 초대 방장화상에는 구산(九山) 선사가 추대되었다.

이는 이 시대에 걸맞은 당당한 현전승보(現前僧寶)를 양성하고 조계선풍(曹溪禪風)을 크게 진작시키기 위함이었다.

또한 스님이 생전에 제자들에게 늘 부촉하던 승보도량 송광사를 중창하고, 한국불교를 크게 중흥하여 불일 보조국사의 목우가풍을 드높이 선양하라는 스님의 유훈을 결코 저버리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닐까!>


佛紀 2539年(1995년) 乙亥年 8월 일

曉峰法語集를 增刊하면서

송광사 조계총림 서울분원 法蓮寺 白雲山房에서

後孫 迷衲 玄虎는 노스님께 九拜하옵고 삼가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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