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덕 7년 봄에 간사한 신하와 아첨하는 내시들이 당시 행재소였던 향수원에 와서 나(충선왕)를 살해하려 음모할 적에 평리 박경량, 유복화, 홍선, 허유전, 이연송, 강융, 이진, 이유 조통 등이 생명을 내놓고 정의를 위해 간신들의 모략을 저지했으니 그들의 충성과 노력이 특출하였다. . .. “ “
충선왕이 정책 결정에 앞서 철저한 현장 조사와 검증 및 실현 가능성 토론 등을 거친 흔적은 오늘날에도 본이 된다. 다음의 전문을 내세우고 정책을 발표 했다.
“돌이켜 생각건대 나의 선조가 건국하던 초기에는 법도가 모두 구비되었었는데 점차 후대로 내려오면서 질서가 문란해졌고, 또 근래에는 간신이 발호하여 나라의 정권을 농락하니 질서와 규율이 파괴되었으며 공사의 전민들을 모두 탈취하고 있다. 인민들은 먹을 것이 없고 국고는 고갈되었으며 권력을 잡은 자들만이 부유하여 창고가 넘치니 내가 이것을 심히 가슴 아파하는 바이다. 이에 사신들을 파견하여 토지를 조사하고 조세와 부역을 이전의 법대로 공평하게 결정하려 한다. 이러한 조치는 대체로 다음에 열거하는 사항을 위한 것이다.”
그 몇 가지 사항만을 기록해 본다.
◇ 나라의 재정예비를 조성할 것
◇ 관리들의 녹봉을 충분히 줄 수 있게 하는 것
◇ 시조왕 이하 역대선조들에게 덕호를 올릴 것
◇ 효자, 순손, 절부, 열녀들에게는 정문을 세워 표창하고 분직을 줄 것.
◇ 우리나라는 소용없는 관직을 많이 제정하였으므로 유명무실한 것이 있으니 현재의 실정을 참작하여 혹은 통합시키고 혹은 축소하고 모두가 성심껏 자기 책임을 완수할 것.
특히 전농사의 설치는 괄목할 만하다.
◎ 왕이 여러 도에 파견하였던 무농사 이후, 육희지, 최백륜 등을 불러서 선유하였다.
“ 내가 전농사를 설치한 것은 중국 한나라의 상평창을 본받아 백성들의 양곡을 조절하기 위해 곡식을 수매 또는 방매하여 그들의 곤란한 때에 구제하려는 것이요 사사로운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 또 나라에 3년 먹을 곡식의 축적이 없으면 나라가 제구실을 못한다.”
다섯째, 이미 앞에서 여러 가지 측면에서 나타나듯이 정치에는 관심이 없어 원나라에 자주 갔다 거나 단순히 여행이나 즐기려는 임금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해다. 승상을 사양하고 고려국왕을 양위하고 이어서 심양왕도 넘겨준 것을 여행이나 즐기려는 것일까? 좀 더 사료를 살펴보아야 알겠지만 현재로서도 그런 것은 아닌 듯하다. 충선왕은 흔히 볼 수 있는 현실 정치인들과는 달리 철학을 실현하려는 데 치중한 것 같다. 즉, 유교적인 정치 철학을 실현하려는 한층 큰 정치인으로 그려진다. 그것은 어린 시절의 받은 교육과 황실분위기와도 연관된다.
일흔 넘은 노 황제 쿠빌라이는 외손자를 끔찍이 아꼇다.
1290년 외할아버지를 알현했던 열여섯 살 때의 일이다.
하루는 쿠비라이가 편전으로 충선왕을 불러 물었다.
“네가 요즘 읽는 글이 무엇이냐?”
“스승인 학자 정가신과 민지로부터 <효경>, <논어>, <맹자>를 배우면서 글을 질문하고 있습니다.”
외손자의 대답에 크게 기뻐한 쿠빌라이는 “정가신을 불러오라”고 명했다.
충선왕이 정가신과 함께 편전에 들어가자 쿠빌라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너는 비록 세자라 할지라도 나의 외손자요, 저 사람은 비록 제후의 신하지만 학자다. 어찌 짐으로 하여금 의관을 정제하지 않고 보게 한단 말이냐“
외손자의 스승을 평상복으로 만나는 것은 예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날 쿠빌라이는 정가신에게 잘된 정치와 잘 못된 정치, 정치의 역사, 풍속의 아름다운 점 등을 오전 3시간 오후 3시간 물었으며 지루해하지 않았다고 한다.
유교의 도덕과 정치철학을 어려서부터 배워온 충선왕은 이를 세계화하는 데에 주력하였다. 자신이 옳다는 신념이 서면 황제의 뜻도 비판한 대목을 볼 수 있다.
선비족의 어떤 중이 원나라 황제에게 건의하기를 “황제의 스승인 팔사파(八思巴)는 몽고글자를 창조하여 국가에 이익을 주었으니 온 나라에 사당을 지어 공자(孔子)와 대등하게 대우하여야 한다” 라고 했다.
원나라 황제가 공경 기로들을 모아놓고 이 문제를 토의하였더니 국공 양안보가 그 건의를 강력히 지지하며 주장하였다. 그래서 충선왕이 양안보에게 이르기를 “팔사파가 글자를 창조하였으니 국가에 공로가 있으므로 그를 제향하는 것이 옛법에도 응당한 일이다. 그러나 하필 공씨에게 비할 것이 무엇이냐? 공씨는 모든 왕들의 스승이라 그를 어느 시대에서나 제향하는 까닭은 덕이 있기 때문이요, 공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만일 공이 있다하여 제향 한다면 후세사람들이 이론이 있을까 두려워하는 바이다.”
감히 누가 황제의 스승을 두고 이런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세계를 바르게 경영 통치하려면 이렇게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충선왕이 자신 그처럼 아끼는 백성이 있는 고려를 떠나 있어야 했던 철학적 이유는 바로 이런 말을 하기 위한 것으로 필자는 본다.
충선왕은 유교의 정치철학을 신봉할 뿐 아니라 이를 통치 이념을 삼고 세계에 널리 전파하는 일에 심혈을 기우린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때 유교도입에 선봉자 안향이 충선왕을 수행하여 중국에 가서 당시 새로운 혁신적인 유학인 성리학을 도입한 것도 충선왕의 뜻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을 것이며 그의 문인 이연송이 300군에 공자묘를 설립하여 그의 노비 600명을 파송하여 봉양하도록 하는 한편, 경서를 간행하여 보내 공부하도록 한 일도 충선왕과 분리하여 생각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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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충선왕의 기이한 행동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정치를 한다고 하면서 한 창 일할 나이에 고려국왕을 아들에게 양위한 일, 심양왕까지 넘겨주고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의 2인자의 지위인 승상의 자리도 물리친 그의 행위를 어떻게 하면 합리적으로 풀이될 수 있을 것인가? 통상적인 정치인을 평가해온 틀을 가지고는 풀이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한국사의 좁은 틀로써 접근하기도 어렵다. 세계사적인 큰 흐름 안에서 한국사를 이해하는 보다 넓은 틀에서나 납득될 듯하다.
필자는 충선왕을 보다 합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 기본 명제가 전제되어야 할 것 같다.
1. 당시의 시대적 상황: 당시는 세계가 원나라의 세력권에 있었으므로 원나라의 바른 정치 없이 고려 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들의 바른 정치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시대적 상황이 전제되어야 한다.
2. 철학적 이념: 충선왕은 유교철학의 정치적 도덕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다.
3. 개인의 체험적 이해: 세계를 호령하는 징기스칸도 손자의 스승, 학자 앞에서는 벌떡 일어나 예를 표현했다는 충선왕 개인의 체험을 전제한다.
세 번째 전제는 사소한 것 같으나 기억력이 좋기로 유명한 충선왕의 뇌리에 항상 자리 잡고 있어 중요한 결단을 할 때에 작용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위의 의문이 풀린다. 첫째 전제는 고려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원나라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첩경으로 판단해 원나라에 있기를 즐겼다고 풀이하면 어떠할지.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인간중심의 유교철학이 그의 기이한 행위전반을 해석하는 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충선왕이 원나라에서 하였던 일들을 앞으로 한국과 몽골의 학자들이 다 함께 연구하여 주기를 주문하면서 이글을 마치고자 한다.
2010년 9월 10일
이 초 식
고려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수안이씨 대종회 회장